유년기 Childhood

 나의 최초의 기억은 걸음마를 떼고 나서였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입에 넣어서 혀로 ‘만져’보는 탐험을 하고 있었다. 주방에 걸려있는 장갑(고무장갑 이었던 것 같다)을 입에 넣어보니 약간의 세제가 있었는지 ‘그물을 만지는 촉감’이었다. 즉시 얼굴을 찌푸리고 퉤퉤 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나보다. 지금 되새겨보면 계면활성제가 혀에 닿을 때의 느낌 아닐까 싶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책이 많은 집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른들에게 물어보기보다는 문자를 찾아보곤 했고, 종종 TV에서 해 주는 과학, 생태 등의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나에게 책은 즐거운 것이었다. 접했던 유머책(지금 떠올려보면 ‘나무야 미안해’ 수준이지만)은 책, 활자는 즐거운 것 이라고 알게 해주었고, 이후 생물도감과 소설은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주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 책이란 차분히 참고 읽었을 때 다소 긴 여정일지라도 큰 가치로 돌아온다는 것을 체득했고, 즐기는 시기였다.
 책을 통해 얻은 것과 함께 인간에 대한 관심은 나에게 인류에 대한 사랑을 길러주었다. 사람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인간에게 문화는 말 그대로 인간의 꽃이라고 하여 문화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한 다양성에 대한 열림,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눈덩이 굴리기와 같은 축적 적 삶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답답하더라도 차근차근 배우고 기억하면 점차 쌓인다는 것.

 경기도 이천시의 논이 펼쳐진 지역, 자연은 온통 놀이터였고, 관찰 대상이 되어주었다. 한 치 앞이 안보일 정도의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는 개구리들이 도망치기 바빴고, 야산에는 산딸기를 따먹곤 했다. 저녁엔 붉은 노을을 구경했고 개 짖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 가득했다. 이러한 자연 친화적 삶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칠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생명이 꿈틀거리고 포근한 놀이터였다.

 한편, 혼자 그림을 그리곤 했다. 호기심이 많고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했다. 재밌는 점은 따라 그리던 책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이다. 무슨 동물이 그려져 있는지 찾기 어려워 목차를 정리하여 적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년기 Boyhood

 97년, 초등학교를 들어가며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상도 받으며 꾸준히 하게 되는데, 후에 입시를 동양화로 정하게 된 계기가 여기에서 출발했다. 필획, 동양화 붓이 익숙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공책을 지저분하게 쓴다며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창피를 준 적이 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하하-웃고 넘겼다. 지저분한 노트는 내 놀이터였다. 글을 쓰고, 메모를 하고, 그림을 그려넣는 것. 이것을 지속하고 발전시키며 현재로 와서는 생각을 메모하고 노트작성을 하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순간의 반짝거리는 생각은 신선식품과 같은 것이다. 그 때를 지나면 상해간다. 반짝거리는 순간에 기록을 해놓고, 그런 생각을 스스로 돌이켜 읽음으로써 가치와 의미가 생겨난다. 그래서 분량이 꽤 모일 때 마다 주기적으로 책으로 엮게 되었다.

 2000년, 초등학교 4학년에는 과학영재로 뽑혀서 초등교육 일부를 시 교육청에서 받았다. 그리고 나 혼자 다니기 힘드니 추가로 한명 더 선발해주기도 했다.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어 감사했다. 지금껏 이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과거의 자부심에 기대어 사는 보잘것없는 자가 되기 싫었고, 미술전공을 하기로 한 이후에는 이것은 예술과는 다른 영역의 이력이며 연관성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작품성을 담보해주지도 않는다.
 작성하고 있는 현재 2024년에는 조금 마음이 바뀌었다. 공동체에 감사해야 할 점으로 느꼈기 때문이며, 나를 이루는 일부로써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을 받거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내가 잘해서 얻어낸 것, 내것으로 증명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상과 권위, 지위와 자격 등은 세상에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을 만들고, 자격을 만드는 것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기존 세대들이며, 뒷 세대를 사랑하고 응원하며 관심있게 지켜보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서예대회를 통해 느꼈다. 아이들은 절대적인 기준으로는 많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대회에 나가면 어린이들은 입선 정도의 상을 쉽게 받을 수 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즐거움과 긍정적인 동력을 부여하려는 따듯한 관심을 받아오는 것이다.

 중학교 전후에는 미술을 전공하기로 진로를 잡았다. 과학자, 공학자의 꿈이 있었지만 경시대회 등을 겪으며 경쟁사회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서야 한다거나, 승자의 이면에는 패자를 만든다는 점이 마음에 쓰였다. 문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기도 했고, 성적 관리 목적으로 다녔던 미술학원과, 초상화를 그려줬을 때 당사자의 좋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미술이 자본주의의 끝자락이며, 매 순간이 경쟁이며,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현장에서 활동하며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걸 알았다면 아마 미술을 하지 않았을 테다.
스스로 느끼기에 학자에 가까운 성격이었으니까.

 


 
청년기 Youth

 미술을 하기로 한 이후, 생각해보기로 미술이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릴 적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더욱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등학생 시절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심리학, 인문서적을 읽으며 다큐멘터리도 많이 보았다. 감각이 예민한 편이어서 더 관심이 갔던 인지과학과 감각에 대한 탐구를 하고, 현상학을 접하며 지금의 작업세계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대학때부터는 입시라는 고삐가 풀리고, 하고 싶던 공부에 더욱 집중했다. (게다가 군복무 포함하여 전후로 휴학을 붙이니 4년이라는 시간이 자유롭게 주어졌다.) 나는 어떠한 결정을 할 때에도 손익보다는 호기심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2016년 5월 14일, 대학교 4학년시절, 삶의 큰 마디가 생겼다. 학교에서는 한중교류전으로 미술대학간의 교류전시가 열리는 때가 있었다. 그 때 전시준비를 하다가 이동식 가벽이 쓰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당시 가장 고학번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고, 막기위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몇초씩의 단편적 기억 두개 이후 중환자실이었다.
 다행히 나 외에 부상자는 없었다.
 간략하게 나열하자면 두개골이 눌리며 전체적으로 금이가고, 뇌출혈, 뼈조각에 치여서 한쪽 중이뼈가 탈락하며 전음성 난청, 안면 신경계 손상 등. 안죽은게 다행이라던 상황에서, 의사분 설명으로는 가장 좋은 경로를 따라서 회복하였고, 한달 후 퇴원했다. 퇴원하고 집에 가는 길에 처음으로 걷는 아이의 기분을 느꼈다. 땅을 밟는 생소한 느낌, 바닥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 걸어다닌다는 것은 큰 권한이었다.


 사실 사고 자체는 별 감흥이 없다. 어차피 기억도 없다. cctv라도 보고 싶었지만 날짜가 밀려나 삭제되어 버렸다. 나보다 주변 분들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하루하루 날짜와 요일을 셈하며 빽빽한 삶에서 몇달의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머리속에 달력이 있어서 중환자실에서도 간호사의 물음에 날짜와 요일을 매번 정확히 말할 수 있었다.) 다만 신경계 손상으로 생각이 뭔가에 막힌 듯 안되거나, 뇌 손상으로 눈을 감으면 반짝거리거나 할 뿐.

 문제는 감각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회복과정과 후유증은 6~8년까지 이어졌는데 그동안 후각은 너무나 엉뚱한 향이 나고, 가끔 가짜향인지 코 내부 피딱지 등 인지 모를 냄새가 혼자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알던 세계가 깨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던, 예민한 감각으로 정밀하게 관측가능했던 세계를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청각 또한 우측 귀를 인공뼈로 바꾸고, 기계실에 들어간 듯 한 이명을 평생 달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오디오를 들을 때 중심 초점이 치우치는 귀가 되었다. (청력을 보정해 들려주는 ‘Nura’회사의 이어폰은 꽤 위안이 되어주었다.)
 얼굴에서 근육신경은 다행히 괜찮았지만 감각신경이 손상을 받아서 일부 감각이 연결되거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감각의 훼손은 사지의 신체 결손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보고 느끼는 세계가 진정한 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내가 직접적으로 기준이 흔들리거나 사라지게 되는 상황에 빠져보니 와닿는 무게가 달랐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 근원으로써 감각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인지 지각과 현상학적 해석을 작품세계로 녹여내고 있었던 나는 더욱 여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또한 사고를 겪으며 ‘뭐든지 하고자 하면 그대로 하는 거지’ 라는 뻣뻣한 풀 같은 성질도, ‘세상에 안되는 것도 있구나’ 싶으면서 자아의 풋내가 좀 줄어들기도 했고, 한 번 죽고 난 뒤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내 삶은 추가로 주어진 것이었다. 관점도 변화하며 ‘나, 이원순’ 이라는 자아를 놓아버리고, 단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존재 개체가 되기도 했다.
 영재교육을 받은 것과, 여러 상을 받았던 기억과, 죽음과 가까웠다가 사회적 안전망에 의해 살아남을 겪으면서 공동체에 대한 감사함이 더욱 느껴졌다. 동시에 이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개인과, 환경과, 공동체와, 생태계는 끊어낼 수 없는 하나의 연장선상으로 연결됨을 느꼈다.